며칠전,
아는 분이 염소를 사왔는데 몇 마리 키워 보겠냐며 전화가 왔다.
소 키우던 외양간도 있고 옥수수 대궁도 그대로 밭에 많고 괜찮을 것 같아서 수컷 두 마리와 암컷 여덟 마리를 들여왔다,
어릴 때 가끔 마을 어귀 개울가에 매어져 비가 올 때마다 유독 매~매 거리는 새카만 염소를 본 기억밖에 없는 나로서는 조금 신기한 기분까지 들었는데, 아이들도 귀여운 염소를 보며 좋아라 야단이다.
쉴새 없이 볏짚을 먹으며 오물거리는 모습이 제법 옹골찼다.
소도 있고, 토종닭도 두 마리 있고 , 염소까지 있으니 동물 농장 같아 내심 좋아라 했는데 일은 엉뚱하게도 그 날 저녁 염소를 우사로 몰아 넣으며 벌어졌다.
얼굴에 노루처럼 누런 줄이 두줄 있는 못생긴 수놈이 훌쩍 울 밖으로 뛰쳐 달아나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9마리 모두 차례로 껑충 껑충 뛰어 달아나는 거였다.
눈 깜짝 할 새 염소들은 추수 끝난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뜀박질도 못하는 염소쯤이야 하고 앞서 가서 몰아 보려니까 우루루 우루루 몰려 뛰더니 이번엔 방향을 잘못 잡아 산 쪽으로 내 달리는 게 아닌가.
해는 이미 삼보산 너머로 기운 때라 날이 저물면 염소는 단 하루도 못 키워보고 산짐승 만드는 거였다.
' 오 하느님' 염소랑 같이 뛰면서 기도를 해야 했다.
곧 잡힐 듯 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달아나는 놈들이 어찌나 얄밉던지 거기다 배가 불룩 나온 남편은 자기도 못 뛰면서 빨리 앞서 뛰라고 성화 였다.
날은 이미 어두워 졌고 염소들은 소재 산 속으로 뛰어 들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가끔씩 움직일 때마다 낙엽 밟는 소리가 내 발자국 소리인지 염소 움직임인지 영 분간이 안됐다.
기가 막혔다. 숨이 턱에까지 차서 더 이상 못 뛰겠다고 주저앉으니 남편이 말했다.
저기 재실 헌집으로 몰아 넣으면 잡을 수 있으니 한번만 더 해보잔다. 기진 맥진 한 상태에서 얼굴에 줄이 있는 수놈을 발견했다.
묘한 게 염소의 생리 였다. 우선 수놈을 헌집 마당까지 몰아넣고 방문을 열어젖히니 훌쩍 방으로 뛰어 들어 간다. 나머지는 식은 죽 먹기로 따라 들어가서 두어 시간에 걸친 달리기가 싱겁게 끝나 버리는 거였다.
나는 아이들과 앞, 뒤 방문을 막고 서 있고, 남편은 집에 가서 차를 몰고 왔다. 야생으로 키우던 목줄하나 없는 놈들과 남편은 방안에서 로데오 경기를 시작했다.
뿔이 제법 사납기조차 한 놈부터 마구잡이로 잡아 줄로 엮었는데 염소의 다급한 울음소리가 절규를 넘어 숨이 멈춘 듯 했고, 문틈 사이로 노릿내 가 휙휙 코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밖에서 다급한 염소울음 소리를 듣고, 아빠 염소 죽는다고 살살 하라 통 사정을 한다.
차 뒤 트렁크에 놈들을 짐짝처럼 실어 놓고야 게임 은 끝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이제 까지 참았던 부화를 한꺼번에 터트리고 있었다.
"당신 나하고 상의 도 없이 염소 사오고", "그리고 내가 일부러 염소를 몰아 낸게 아니라 제 놈들이 뛰어 나간 건데 왜 짜증을 나한테 내냐고"
"다 개소주 집에 데리고 가서 염소 탕을 만들던지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고요."
그때까지 얌전히 듣고만 있던 남편이 말했다.
"이놈들 덕분에 배에 살 좀 빠진 거 같지?'
"당신도 생각보다 잘 뛰던데 "
" 아이고 내 팔자야 싸움도 못하겠어"
199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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