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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월이 되면
작성자 공병임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0-01-13 22: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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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20
 

오성근 선생님과의 인연은 촌뜨기인 내가 이천의 중학교에서 소위 유학을 간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에 맺어 졌다. 학교 배정 추첨이 끝나고 보니 내가 갈 학교는 인천보다 부평에 더 가까운 아주 변두리의 신설 사립 학교 였다.



뒤로는 약산이 있고 학교 등굣길 내내 붉은 황톳빛 흙이 아무렇게나 쌓여진 개발 지구내 지역이었으니 이 학교에 배정 받은 나는 실망이 대단했다. 인천 여고도 있고 박문 여고도 있고 오랜 전통과 명문으로 소문난 학교를 두고 하필 30여분 통학할 신설 학교라니....


그러나 그중 약간의 위로가 되는 것은 자주색 세련된 교복이 도내 교복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했을 명성만큼 예쁜 게 다행이었다. 베레모부터 시작해서 넥타이 메고 스커트에 벨트, 그리고 자주색 구두까지 갖추고 나면 흡사 여군과 비슷하다고 할까. 하긴 여름 하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긴소매 y 셔츠를 군인처럼 세 번 접어서 입는 교복은 군복을 닮았다.


아무렇거나 우린 공부보다 외모를 꾸미는데 더 치중했고 갈래머리를 어떻게 하면 예쁘게 땋을까 서로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내던 삼월 초 이었다. 아직 과 담당 선생님과 얼굴도 익히기 전인데 무슨 일로 고3 담임이던 오성근 선생님에게서 우리 영어 과목에 한시간 보충을 하러 들어오셨다. 그분의 첫 인상이 너무 순박하다고 느끼기까진 채 일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누군가 들리는 귓속말로 저 선생님 별명이 '쪼린 감자래' 하는 것이다.

순간 교실은 손바닥 발바닥 구르며 웃는 계집애들 때문에 이미 수업 분위기가 아닌걸 아셨는지 아니면 담임이 아니라서 그냥 인생의 이야길 하시기로 작정하셨는지 맥없이 따라 웃기만 하시더니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오늘 아침 나는 참 행복했어요. 도시 가운데 이런 숲의 향기가 있고 자연을 벗한 곳에서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게다가 날아가는 새가 내 머리 위에 똥을 쌓거든요." 두툼한 안경 너머에 꿈에 잠긴 듯 작은 눈으로 우릴 바라보시는 가녀린 체구의 선생님.

그분의 뜬금없는 새똥이란 말에 모두들 웃느라 키들댔지만 나는 예리하게 그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분은 반드시 시인 일거라고. 입학 한지 한달 내내 학교생활 익히느라 어수선하고 엄마 아버지 떠나 할머니 댁에서 낯선 생활을 시작한 나는 그 날 첨으로 이 학교에 오게 된 것이 맘에 드는 하루 였었다.




창을 열면 숲에서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을 타고 들어오고, 비내리는 날은 젖은 나무에서 버섯과도 같은 향기한 숲의 냄새가 그렇게 정겨울 수 없었다. 그분은 다시 3학년 수업을 하시느라 눈인사 한번 마주 한 적 없다가 내가 고 3이 되면서 담임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조회나 종례시간에 전달 사항은 뒷전이고 한 구절 시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시던 멋쟁이 선생님.

꿈 많던 그 시절 선생님을 가슴에 품고서 나도 시인이 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지옥 같은 수험생 시간표는 아침 7시 방송수업부터 밤 열시 보충 수업까지 이어졌다. 우리 집은 제물포에 있어서 전철 통학이 편했는데 학교에 가려면 동암역에서 내려서 30 분은 족히 걸어야 하므로 신 새벽에 지나는 전철을 탔다고 해야 말이 된다.

안개에 휩싸인 호박밭을 지나고 코스모스가 무리 지어 피어난 아름다운 들길을 걸을 때면 이곳이 인천이란 도시가 아니라 고향집 어귀를 걷는 듯 평온해서 지금까지 혼자 걷는 걸 좋아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게다.

학교 뒤 산길로 조금만 넘어가면 약사 사란 큰절이 있어서 토요일은 아예 산길을 걸어 약사사 큰스님과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기도 했다.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도 모르고 큰스님은 어느 소나기 내리던 토요일 나랑 친구를 법당으로 안내했고 우리가 일어설 무렵 목에 걸고 계시던 묵주를 선물로 주시며 마음이 스산한 날에 이걸 손에 굴리며 기도하라 하셨다



.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 속에서 올곧은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나게 된 나는 참 행복한 만남을 시작한 거였다. 그러나 살벌하다 할 만큼 엄숙한 고3시절 선생님과의 오붓한 시간을 좀처럼 갖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결혼하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결별을 선언한 산골의 목장새댁 시절이 선생님과 더 가까운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입학 후부터 선생님이 30여년 정년 하실 때까지 모교에 계신 것이 내겐 친정아버지처럼 다정하신 시간들이었다. 선생님은 내 그리움의 편지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답장을 주셨다, 놀랍게도 선생님의 편지지는 늘 모의 고사 답안지 이면이었고 그걸 미루어 일주이 마다 치르는 모의 고사 시간에 장문의 편지를 내게 쓰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산골의 경이로운 사계에 관해 편지로 썼고 선생님은 무조건 내 산골생활이 제일로 성공한 삶이라고 응원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험생을 맡아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들이 자연으로 살고 싶으신 시인의 마음을 얼마나 답답하게 옥죄엇을까
그 사이 선생님은 여러 권의 시집을 내셨고 난 평범한 산골아낙으로 점점 생활의 권태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마지막 돌아갈 고향을 지키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몇 년 전 정년을 겸한 출판 기념식에서 많은 하객들 앞에 날 소개 하셨 었다. 성공한 제자가 수없이 많은 선생님께 지극히 평범한 나의 존재는 미미했는데도 20여년 고지식하게 편지를 띄운 나를 선생님은 기억하신 것이다.


5월이 되면 사랑하는 제자에게로 시작되는 선생님의 편지글을 읽으며 스승의 날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젠 꽃다발만 아니라 찾아뵙고 그간의 시간들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듯 주절이 주절이 들려 드려야지. 한번도 남학교에 계시지 않아서 술대접하는 씩씩한 제자 가 없는 것이 아쉽지만,

대신 곰살맞은 여제자들의 수다도괜찮다 아니 하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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