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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할아버지
작성자 공병임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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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0-01-13 23: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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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58
 

할아버지
- 공병임 -

내가 태어나던 해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할머니 안계신 사랑방엔 우리 삼남매가 조롱조롱 자라고 있었다.
할머니 젖 대신 할아버지 젖을 만졌고 가끔씩 주막에 라도 가시는 날엔 줄줄이 할아버질 따라 나섰다. 할아버진 약주를 좋아 하셨다.
주막에 가신 날은 영락없이 취했으니까.
그래도 다음날 새벽이면 소죽을 쑤시며 우릴 위해 콩이며 고구마를 곧잘 구워 주셨다. 유난히도 병치레만 하는 날 위해 자전거로 학교까지 바래다 주시길 또 좋아 하셨다.
밤엔 누가 할아버지 곁에서 잘껀지 셋이 다퉜다. 매일 등허리를 긁어 달라고 하셨고, 자는 우리를 꼭 한번씩 깨워 오줌을 누라고 성화셨다.
여름이 무르 익으면 할아버지는 논두렁 평평한 곳에 샘막을 지으셨다.
오후 서너시 될 때면 엄마는 우리에게 감자며 옥수수 찐것을 챙겨서 들로 보냈다. 군것질 거리라도 있어야 오래 샘막에서 놀다 올테니 말이다.
해가 동산이 반쯤 걸치면 할아버지는 소 뜯기로 개울둑에 가셨다.
샘막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바라보는 저녁놀은 참으로 신기하기 조차한 광경 이었다. 넓은 벌판이 있고 군데 군데 하늘을 찌를듯이 미루나무가 있고, 그 미루나무들은 우리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참새떼가 한무리씩 미루나무에 숨어 버렸고 또 쉬어가는 때문 이었다.
아 우리집에 마차도 있었다. 큰 암소가 마차를 끌었고 할아버지는 소 고삐를 잡고 우리는 덜커덩 거리는 마차타기를 무슨 비행기 타는 기분으로 누워서 탔었다.
자라는 우리는 하루 하루 커 갔고 상금 학교때는 자취를 위해 하나 둘씩 할아버지 곁을 떠났다. 그나마 고등학교 부터는 아예 도시로 유학을 했으므로 어쩌다 집에와 할아버지 방에가 자자면 어쩐지 우충충했고, 냄새가 나는듯 했다.
내가 시집갈 무렵 연년생 남동생 둘이 한꺼번에 군에 지원을 해서 커다란 집안엔 할아버지와 엄마, 아버지만 남았다.
할아버진 툇마루에 나와 앉아서 언제 그 놈들 제대하냐고 군에간 날부터 성화셨고 점차 기력이 쇠퇴했다. 할아버지 등허리를 밤마다 긁어 드리고 그리고 할아버지 가슴을 더듬던 내가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쇄잔한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 소죽 쑤라고 아버질 닦달했다.
아~ 인제 아무런 낙도 없으셔서 소 외양간이 돼지우리가 된것도 모르시는 그분의 소죽 타령, 두 남동생 제대 후 학업으로, 직장으로 훌훌 떠나버린 사랑에서 필터만 남은 꽁초를 자꾸 태우셨다.
며느리도 손녀도 분간 못하시며 일찍 돌아가신 할머님 생신을 기억 하시는 분.
대,소변 받아 내기를 몇 년이나 하신후 지난겨울 우리의 곁을 슬그머니 떠나신 할아버지.
내내 춥다가도 삼오제 끝날까지 봄날처럼 따사한 햇볕을 주셔서 엄동설한에도 잔디 옷을 입으신분.
국화꽃 향기 날리며 할머니께 가신 내 할아버지가 못내 그리워서 벼개잇이 흠뻑 젖도록 불러보는 이름.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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